April 20th

93 (-) #2

양양팡팡 2020. 3. 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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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1 - [April 20th] - 93 (-)


 

아직 우월감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중심정맥압을 측정해야하는 환자분께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안녕하세요! 몸에 수분이 얼마나 많은지 한 번 알아보는 검사 좀 할게요. 아픈 건 아니시고 편하게 누워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깨끗하게 쓰리웨이 마개를 열고, 마개를 알콜솜 위에 보관을 하고, 측정을 했다. 압력이 0 (negative)이 나온 것을 확인하고 안전하게 마개를 닫으려고 하는데 마개 뚜껑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알콜솜 위에 올려뒀는데?? "어 저기, 여기 마개 못 보셨나요?" 라고 물어보자 큰 콧방귀 소리가 들렸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지만 이제와서 마개를 찾는다고 해도 어디 굴러떨어진 마개를 연결하기엔 나 역시 찝찝했기 때문에 간호사선생님 호출버튼을 눌렀다.
'선생님, 바쁘신데 정말 죄송한데요. 0000실에 쓰리웨이 마개 새로운 거 하나만 가져다 주실 수 있으세요?' 하고 호출벨에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아니, 선생님께선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마개를 가지고 다니시지 않으십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다.

화장실을 갈 때마다 불을 껐다 켰다 하지만 불이 나갈까봐 전구를 들고가는 사람은 없잖아.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쯤, 간호사 선생님께서 뚜껑을 가지고 오셨고 나한테 결과 값이 얼마가 나왔는지 물어보셨다. 여기서 나는 일생일대의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0이요' 혹은 'negative요' 라고 해야하는 걸 '안 나왔어요.' 라고 말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리를 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뒷통수를 때리는 큰 사자후가 들렸다.

"아니 선생님께서는, 검사 결과가 안 나왔는데 어딜 대충하고 사라지십니까. 선생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선생님께 법적인 조치를 취해도 되겠습니까. 선생님은 면허가 있으십니까. 선생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시는 분이십니까. 제가 병원장을 만나뵈도 되겠습니까. 선생님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선생님께선 그러고도 의사가 맞으십니까." 삿대질과 함께 연달아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나도 모르게 넋을 놓게 되었다. 당황해서 옆에 간호사 선생님을 돌아봤는데 그 눈에서 "제가 조심하랬잖아요....." 라는 무언의 비난을 읽을 수 있었다. 아 이 분이셨구나......

 

그 이후로 매일 아침 6시가 힘들었다. 일주일간 살이 4키로 빠진 것은 좋았으나, 머리카락도 빠지는 것만 같았다. 그 때부터 내가 시행하는 검사는 모두 거절하고 다른 의사에게서 받고 싶다고 하시길래 '정말 그걸 원하시면 그렇게 진행하겠지만 지금 다른 의사선생님들 모두 바쁘시기 때문에, 제가 다른 분께 부탁을 해서 진행할 경우 검사시간이 늦어질 수 있다.'라는 말씀을 드리니 나는 협박죄로 한 번 더 고소를 당할 뻔하기도 했다.

결국 아침마다 카톡방에 "정말 죄송한데 CVP (중심정맥압)  측정해주실 수 있으신가요...."올리게 되었고 "아니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걍 관 연결만 하면 되는 CVP를 거절당하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병신이냐??" 라는 조롱도 감수해야만 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나 대신 CVP를 측정하러  와준 동기들 마저 그 분께 크게 혼났다는 점이다. 하루에 한 명 씩 내 편이 생겼다.

 

일주일 쯤 지났을까, 이제 부탁할 염치도 없고, 부탁을 들어줄 동기들도 사라졌을 무렵, 나와 그 분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 분이 열이나기 시작하면서 "혈액균배양검사"를 시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혈액균배양검사란, 쉽게 말해서 혈액 안에 균이 있지 않은지 피를 뽑아서 균을 키워보는 검사다. 즉 그 분에게 바늘을 꽂아야하는 상황이 온 것. 쉼호흡 크게하고 검사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검사를 진행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길지 말하고, 피를 뽑는 일은 이 병원에서 내가 제일 잘한다 (물론 아니다.)는 뻥카도 쳤다. 결국 채혈을 하게 됐고 결과는 한번에 성공.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내 국가고시 실기시험 중 이 혈액균배양검사가 첫번째 시험술기였다. 그 때, 면접관이 코를 들이대면서 보고있을 때 보다 더 집중해서 시행했던 것 같다.

술기는 완벽했으나 한 가지 불운은, 술기 후에 열이 더 올랐다는 점이다.

 

그 다음에 정기적인 소독을 하려고 찾아갔는데, 이 때는 진짜 고소당하는 줄 알았다. 그 분은 나 때문에 열이 나게 됐으니 내가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질 것인지를 물어보셨다. 이 때 나는 당직이다 뭐다 해서 상당한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상태였기 때문에 대꾸할 힘도 없었고 옆에 계신 간호사 선생님께서 내 편을 많이 들어주셨다. "열이 나서 시행한 검사이기 때문에, 검사를 하고 나서 열이 났다는 주장은 맞지 않는다." 라고 내가 할 말을 대신 해주고 계셨지만 잠에 취한 나는 꿈을 꾸는 듯 흐릿하게 세상이 보였다. 이 때 나는 한 가지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흐릿하게 보이는 화난 보호자 뒤 편으로 무서워 하고 있는 그 분의 모습이 겹쳐보이는 것이었다. 마치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장난감처럼 흘긋흘긋 그런 모습이 보였다. 내가 진짜 수면 부족이구나.... 란 생각과 동시에 말이 헛 나오게 되는데 "많이 걱정되시죠...?"란 말이 나왔다. 그러면서 손을 덥석 잡았더니 화를 내던 그 분께서 눈물을 삐질삐질 쏟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자신의 신세한탄을 시작하시는데, 몹시 당황스러웠다. 다 듣고 시계를 보니 2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결국 그 날은 일이 엄청 밀려서 점심 저녁도 못 먹으면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 날 부터 그분과 나는 굉장히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렸는데, 그 관계를 정말이지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

새내기배움터가서 취한 상태로 "야이 미친!! ㅆㅂ! 개웃겨! 우리 처음 만났는데 완전 개 잘맞는듯! 우리 완전 친하게 대학생활하자!! 하하하하!!" 하던 동기와 아침에 술이 깬 상태로 다시 만났을 때 그 민망함. 정확하게 그런 관계가 시작되었다. 뭔가 친해진 것 같기도 하지만 감정적인 모습을 너무 보여줬다는 후회... 그..... 어색한... 그런 묘한 관계... 나는 그래도 내 일을 다른 동기들한테 부탁해도 되지 않아도 됨에 감사하며 지내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채혈을 하려고 기다리는데 병실앞에 교수님께서 회진을 도는 것이 아닌가. 교수님이 회진도시는데 그걸 중단하면서 채혈을 할 순 없으니 병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회진이 끝나고 그 분께 다가갔다. "잠시 채혈 검사좀 하겠습니다. 한 번만 따끔해요!"
".... 왜 교수님 계실 때는 안 하다가, 이제와서 채혈검사를 한다고 하는거야? 하! 진짜 맘에 안 들어, 뭔가 캥기는게 있어서 그렇지??"

이걸 뭐라고 대답을 해야하나, 고민을 하다가 한 마디 하게 되는데 "......굳이 시어머니 앞에서 저녁준비 시작할 필요는 없잖아요?? 곧 시어머니 댁에 돌아가신다는데....." 라고 말을 했다. 근데 그 분의 시집살이가 유독 힘들었던 것일까. 진짜 모든 환자가 깜짝 놀랄 정도로 박장대소를 하더니 내 등을 팍팍팍팍 때리면서 웃는 것 아닌가! 선생님 너무 재밌다며, 평소에 날 얼마나 좋아했고, 만나는 교수님들마다 내 칭찬을 한다며 봇물터지듯이 칭찬을 늘어놓으셨다. 개인적으로는 눈물을 흘리셨을 때보다 더 당황스러웠다. 그 때부터 나에게 아침 6시는 간식시간, 영양보충 시간이 되었다. 매일같이 과일이며 홍삼이며 먹을 것을 주머니에 꽂아주셨고 빠진 살을 다시 찌우며 일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이 분과는 인터넷에 적지 못 할 많은 추억이 더 있다. 그것들은 모두 기억속에만 남겨둘 건데, 그건 너무 자세히 적다보면 이 글이 내가 어떻게 성장했음을 적는 글이 아니라, 내 억울함을 토로하는, 그 분을 비난하는 글이 되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분을 통해 깨닫게 된 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픈 분들께서 불만을 표시하는 건, 우리 한 번 의학적으로 잘잘못을 가려보자는 말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대고 '나는 의학적으로 떳떳하며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주장'하면 대화 자체가 되지 않는다. 대화의 목적자체가 다르니까. 라뽀 (rapport, 환자 의사와의 관계)는 깨질대로 깨지고 회복할 수 없게 됨을 깨달았다. 그 분들은 어디까지나 건강을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상태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설명과 위로가 필요한 것이었거늘...... 사실 나는 별 생각없이 잠에 취해 반박할 기운이 없어 그런 거긴 했지만.

두 번째로 느낀 점은, 확실히 사람의 호감을 얻을 때는 성공한 드립만한 것이 없다.

어느 의과대학이건 입학식 졸업식에 학장님께서 항상 하시는 문구가 있다. "환자는 최고의 교과서"라고.... 여러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 말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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