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020/1월 겨울한라산

[겨울 제주도 / 겨울 여행] 혼자 한라산 #2 :: 일생일대의 잘못된 선택

양양팡팡 2020. 3. 1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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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여행하면서 공책에 적었던 내용들 옮겨보기

1. 성판악으로 갈까, 관음사로 갈까.

관음사로 올라가는 것이 진짜 말도안되게 힘들다고 하길래 성판악으로 올라가서 성판악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게하에서 만난 아저씨가... 성판악으로 가서 성판악으로 가는 건 비추고 겨울 한라산은 관음사라고 관음사를 강력추천하는 것이다.

아... 한라산에 온 이유가 뭔가 성취감을 얻고 싶어서 방문한 것이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관음사로 올라가고 성판악으로 내려가야겠다.

 

 

같은 겨울에 한라산 갔던 고등학교 친구와의 카톡.

 

 

2. 해뜨기 전 휴게소에서 대기하다가 밝아질 때 쯤 출발.

 

 

3. 아니 지금 당연히 빨간색 코스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초록색이라구요??? 벌써 너무 힘든데요??? 이거 표지판 잘못된 거 아닌가요??? 어떤 짖궂은 등산객이 표지판을 뽑아서 다른 곳에 심어둔 거 아닌가요?????

 

 

4. 아니, 왜 저 같은 운동부족이 한라산 가겠다고 했을 때 아무도 저를 말리지 않으셨나요.

적어도 관음사 코스로 올라가겠다고 했을 때 아무도 말리지 않으셨던 건가요.

아니, 지금 생각해보니 몇몇분은 말리셨는데 왜 더 강하게 말리지 않으셨나요.

 

 

 

 

 

5. 아니, 한라산 올라가다가 허벅지 터진 사람 없나요?? 제주도관광공사의 거대한 음모 아닐까요?? 허벅지가 이렇게 터져버릴 것 같은데 실제로 뻥하고 터진 사람이 하나 쯤은 있지 않았을까요???

 

 

 

 

 

6. 이 쯤 올라가면 사람들은 고개만 숙이고, 터벅터벅 올라가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감히 비유하자면) 성지순례를 하는 순교자들을 떠올렸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순교자들의 마음엔 평온함이 있었겠지만 우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씨발씨발 하면서 산을 오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6-1. 만약에 한라산이 대나무 숲이었으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처럼 씨발의 숲이 되었을 것이다.

 

 

 

 

 

7. 씨발의 숲과 후회의 계단을 오를 때 쯤에 내 허벅지에 강력한 쥐가 나기 시작했다.

종아리에 쥐가 나면 발가락을 당기면서 스트레칭하면서 풀어주면 되지만 허벅지에 쥐가나기 시작하니까 도저히 답이 없었다. 겨우겨우 쥐가난 근육을 당겨주는 스트레칭 자세를 발견해서 세 걸음 걷고 스트레칭, 세 걸음 걷고 스트레칭 하며 올라갔다.

이 때 당시 나는 내 모습이 "삼보일배"를 하는 불자와도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삼보일배"를 하면서 속으로는 "하나님 제발"을 외치고 쌍욕을 내뱉는 내 모습이 상당히 기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8. 약 두 번 정도 죽을 뻔한 상태로 중간 대피소에 올랐다. 패딩을 벗으니까 몸에서 스팀이 막 났다.

 

 

누가 먹던 젓가락인게 뭔 상관

8-1. 이 때 웃겼던게, 2020년 목표중에 하나가 "낯 가리는 성격 고치기"가 있었다. 올해에는 처음보는 사람과도 남들만큼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겠다... 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걸 이 대피소에서 달성하게 되는데ㅋㅋㅋㅋㅋ 낑낑거리면서 가지고 온 끓는 물 500미리를 육개장 컵라면에 붓고 3분 뒤에 여는 순간 내가 젓가락을 안 들고 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라산 중턱에서 컵라면을 먹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음과 동시에 나는 주변에 초면인 사람들에게 "아 저기 죄송한데, 젓가락 다 쓰고 버리실거면 저 주시면 안될까요? 제가 라면에 물을 부웠는데 젓가락을 깜빡해서요" 라며 눈물의 똥꼬쇼를 하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아.... ㅅㅂ... 젓가락 어쩌지.... ㅠ..... 막 쓰던거 빌려달라그러면... 변태라고 오해하면 어쩌지... 그냥... 쓰레기장 뒤져볼까... 그건 또 싫은데... 아 그냥 먹지말까...ㅠ..."하고 있었겠지만 이 절박함이 내 성격을 바꾼 것이다.

라면을 못 먹을 수도 있단 생각에 충혈된 내 눈을 봐서인지 아저씨는 흔쾌히 빌려주셨고... 덕분에 맛있게 라면을 먹을 수 있었다. 진짜 다행이야. 세상 대존맛... 인생 최고의 라면이었다.

 

 

9. 라면 먹고나서 다시 지옥길이다.

이 때, 나는 진짜 죽기 직전인 단계였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한라산을 갈 사람인지, 다녀온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건 한라산 정상을 등반한 사람이 그렇게 정신력이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에 #한라산 #백록담 #1950m한라산정상 을 치면 대부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2020년 화이팅~" 하는 문구들이 적혀있겠지만 내가 장담하는데 100에 99는 나처럼 씨발씨발 괜히왔다 하면서 올라갔다는 의미이다.

만약에 한라산 중간에서, 뿅하고 숙소로 돌아갈 수 있는 버튼이 있다고 했을 때 그걸 안 누르고 정상까지 등반한 사람이라면 인정. 나 역시 멘탈은 넝마짝이되어 중도 포기상태였고 그 가파른 길로 다시 내려갈 수가 없어서 정상찍고 완만한 성판악으로 내려가려고 올라간 것이다.

 

 

10. 장갑을 안 끼고 가서 손가락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11. 그렇게 1800m를 넘기고나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되는데, 해발고도 1800m 라고 쓰여있는 석판을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풍경이 달라지면서 보람 비스무리한 걸 느낄 수 있다.

 

 

파노라마도 한 번 박아주고

 

 

 

 

 

12. 보통 우리가 사랑에 빠진 순간을 구름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표현하지 않는가??

그 표현을 처음 만든 사람은 한라산을 꼭 방문해보길 바란다.

구름위를 걷는 기분은 아주 생지옥중에 지옥이다.

 

 

 

 

 

13. 여러 우여곡절끝에 나는 관음사로 올라가서 성판악으로 내려가는 코스로 등산을 끝낼 수 있었다.

 

 

 

 

 

14. 게하에서 술 먹는데 술 안주 에바야;;...... 탕수육 소스에 귤 왜들어가는데

 

 

15. 여행다녀와서 게하에서 사람들이랑 여행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공유뿐만 아니라 어떤 걸 봤고 어떤 걸 느꼈는지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알쓸신잡을 생각해보자. 우리보다 훨씬 똑똑하여 여행지에서 느끼는 것들이 많았을 인물들이 똑같은 여행지를 여행하고 돌아와 저녁에 나누는 이야기들을 보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느끼고 돌아온다. 아는 것이 많아서 아는 만큼 보였을 사람들도 그 정도인데, 하물며 나같은 사람은 어느 정도겠어.

이번에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한라산을 찾아오게 됐는지, 올라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주변에서 어떤 풍경을 봤는지, 중도 포기하던 사람들은 어떤 표정이었는지, 어떤 사람들을 봤는지 이야기를 나누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15-1. 그렇지만 대놓고 파티를 하는 게하는 싫다. 막 중간중간 자리도 섞고 그런 느낌의 파티는 별로라고.... 여행자끼리의 대화가 아니라 이성끼리의 대화를 유도하는 건 싫어.... 내가 봐도 참 까다로운 성격이다.

16. 나에게 누군가 겨울 한라산 추천 코스를 물어본다면 나처럼 관음사코스로 올라가 성판악으로 내려가는 걸 권할 것이다.

너도 한 번 혼나봐라 라는 이유는 아니고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일단 100에 95는 성판악으로 올라간다. 성판악으로 올라갔던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주말에는 거의 줄을 지어서 등산을 한다고 하는데, 관음사 코스는 시야에 한 두명 들어오는 정도로 듬성듬성하게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관음사로 올라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가오를 부릴 수 있다.

이 2가지 이유로 체력만 된다면 관음사를 추천한다.

되도록이면 그냥 뜨뜻한 방구석에서 넷플릭스 보면서 귤까먹길 추천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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