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0th/직장

호두과자

양양팡팡 2023. 10. 6.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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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원에서 일하다보면 사정이 딱한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태어나길 F 100%로 태어난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짠스럽고 도와주고 싶어하지만, 만성 피로에 절여져있을 때는 마음과는 다르게 말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많이 아프시진 않으세요...? 예? 죽을 것 같다구요...? 다 좋아졌는데 왜 자꾸 죽을 것 같다고 하세요. 정말 죽을 것 같다는건, 할머니 지난주에 쓰러지셔서 중환자실 가셨을 때구요... 그 땐 기억도 안 나시죠...? 많이 좋아졌으니까 죽을 것 같다고 누워만 계시지 마시고 오늘은 좀 걸어보세요..."

 

"예? 퇴원하면 나가서 맥주 한 잔 하자구요? 제발 말 같지도 않은 말씀하지 마세요."

 

"저 총각 아니구요, 간호사 선생님도 아가씨 아닙니다.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예? 할머니는 아가씨같냐구요? 진짜 말 같지도 않은 말씀하지 마세요."

 

잠깐만... 이렇게 다시 읽어보니까 걍 쌉 T 같은데

 

그런데 이런 대화의 티키타카에 목마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은근 웃음과 짜증 동시에 섞어서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손자보다 어린 놈이 떽떽거리는 것이 마냥 재밌으신 것일 수도 있다. 오늘은 유독 그랬던 할아버지 이야기.


칼에 수 차례 상처를 입은 할아버지에 대해 보고를 받는데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잠이 덜 깬건지, 기록을 작성한 인턴 선생님이 졸면서 작성한건지 한글로 써있는데 구절 하나하나가 납득이 안 됐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확인을 해봤다. 알고봤더니 인턴 선생님은 죄가 없었고, 기록은 모두 사실이었다. 2023년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싶어서 놀랐다.

 

 

 

 

다행히 내부장기 손상이 없어서 국소마취로 꼬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범위가 넓어서 30분은 족히 걸릴 것으로 생각됐다. 할아버지의 사정을 생각하면 짠했지만, 정규 일에 허덕이는 와중에 추가된 응급상황을 진심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의사는 많진 않다. 야호 칼에 찔린 사람이 생겼다! 오늘도 무보수 야근 확정! 럭키다제~ 정말로 행복해!

 


아니 할아버지 진짜 왜 그랬어요? 하 진짜 속상하네... 소독합니다. 따끔해요. 소독할 때 아프지, 아프실 걸 몰랐냐구요오. 그니까 왜 그랬냐고요 증말. ... ... ... 그래 속상하겠지... 이해는 합니다.에휴................ 할아버지,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몸이 걍 영양실조시네

 

...

 

예?

 

호두과자

 

오~ 호두과자~~ 팥? 요즘은 팥 말고 치즈나 크림 같은거 넣기도 하던데요.

 

팥 호두과자.

 

오~

 

니 얼굴 호두과자

 

...?

 

니 생긴게 호두과자같아서 호두과자가 먹고싶다고

 


지금 내가 들은게 맞나 싶어 어안이 벙벙해졌는데 옆에서 봉합을 도와주시던 간호사 선생님들께서 웃참하시는 모습을 보니 내가 잘못들은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 웃참하시는 모습에 자신감을 얻은 할아버지는 계속 신나서 얘기했다.

 


얼굴이 ㅋㅋㅋ 호두과자 ㅋㅋㅋ 생긴겤ㅋㅋㅋ엌ㅋㅋㅋ 호두과자 ㅋㅋㅋㅋ

 

알았으니까 조용히 좀 하세요.

 

엌ㅋㅋㅋㅋㅋ 어떻게 사람 얼굴잌ㅋㅋㅋㅋ

 

할아버지 이 쪽은 마취 안하고 꼬매실래요?


 

이후로 갈 때 마다 이상한 말씀하는데 진짜 어이가 없어가지고 웃으면서 다 받아주니까 좀 친해졌다.

 

 

병원장님이 조카분이시라구요? 이건 또 뭔 소리에요 진짜... 성이 다르신데요? 병원장님 성을 다시 알아보라고요? 뭐라는 거야 진짴ㅋㅋㅋ

 

병원을 옮겨달라구요? 저희도 옮겨드리고 싶죠. 할아버지 입원시키고 싶어서 병원들이 서로 난리라구요? 아니 진짴ㅋㅋㅋ 격리문제 때문에 연락하는 족족 빠꾸먹고있는데 진짜 무슨 자신감이에요?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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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 고생 많으셨다고 호두과자 사왔어요. 할아버지 거의 영양실조세요. 할아버지 나이때는 식사만 잘하셔도 돼요. 약이라 생각하고 드세요. 뭔 또 지 같은 걸 가져왔다 그래요. 놓고갈테니 드시던지 말던지.

 


그러다가 배고파가지고 몇 개 먹을라고 병실 돌아갔더니 한 박스를 그새 다 드심;; 진짜 좋아했나봄... 우리팀 간호사 선생님들 핸드폰에 호두과자라고 저장되는 수모가 진행중이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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